2. 고등학교 재학 기간 또는 최근 3년간(단, 초등학교, 중학교 재학 기간 제외) 학내외 활동 중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을 3개 이내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 각 활동별로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700자 이내로 작성
(ㄱ)
한때 저는 친구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봐 그들 앞에서 제 생각과 의견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조별활동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개인수행평가를 선호했습니다. 하지만 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저는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오히려 친구들과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깨달았습니다.
( 앞에서 말했듯이 첫문단에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짧고 간결하게 쓰자 요즘에는 뒤에 고쳐준것처럼 제목을 쓰는것도 나쁘지않다.)
전경련 한경 청소년 경제 체험대회
▶ 두려움이란 성벽과 같습니다. 성벽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저를 보호해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제가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 버린다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4명이서 한 팀이 되어 활동하는 이 대회의 과제는 우리 주위에서 경제 관련 체험을 하고, 경제체험활동일지와 기업탐방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과 계획을 짜고 기업과 재래시장을 방문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3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제 생각을 친구들에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친구들은 제 의견에 호응해주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보충을 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친구들의 의견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저는 그동안의 막연한 두려움이 저를 협소한 틀에 가두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친구들을 통해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각하면서도, 제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더 확장,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그 결과 저는 기존의 수동적인 모습 대신 스스로에 대해 능동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었습니다.
( 딱 봐도 읽기 싫다.. 글쓴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너무 구구절절 이야기를 하는것같다..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할 필요가없다. 글자수만 채우겟다는 의지로 보일뿐..)
▶ 이런 점에서 이 대회는 하나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대회의 활동은 3개월간 4명의 조원으로 구성된 팀이 경제관련 체험을 하고 이를 보고서로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수많은 기업과 재래시장을 방문하면서 책으로만 배웠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해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즐거움이었습니다. 어렵기만 했던 경제학적 지식이 노점상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누구도 경제활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 활동은 살리되, 그 과정을 축소하고 그과정에서 배운 느낌점을 살려서 고쳤다.)
하지만 이 대회는 제가 쌓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밝은 성격의 저이지만, 지식에 관련한 분야에서는 혹시라도 틀릴까봐 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조원들과 의견을 교류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 의견을 말하는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상대의 의견을 어떻게 경청해야하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서 함께 하다 보니 짧은 시간 내에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제게는 수확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성벽을 쌓는다고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의사소통이 이뤄질 때 저를 보호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저 역시 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 앞에서 성벽이야기를 꺼냇으니 마지막에서 일관성을 위해 성벽이야기를 한번더 꺼내고. 글쓴 학생이 말한 깨달음도 조금 수정하여 바꿔주었다.)
(정확히 700자)
( ㄴ ) 밴드 드보락
삶을 살면서 자신이 어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중학교 때까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밴드를 하면서 드럼이라는 인생의 동반자와 만났습니다.
(이제 말안해도 알겠지??)
▶ 무능력도 죄다!
능력도 안되면서 자신의 욕심만 내세우며,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든다면 본인은 만족하겠지만, 그로 인해 주변사람들은 피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취미로 시작했던 저의 고등학교 밴드부 활동은 단순한 동아리 활동을 넘어 자신의 무능력이 주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가르쳐 준 계기가 됐습니다. 중학교 졸업 때까지 저는 악기는커녕 악보도 볼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고교 입학 후 드럼 소리가 좋아 무작정 드보락이라는 학교 밴드부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부원들은 이미 수준급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의 존재가 밴드부 전체에 피해를 주게 됐습니다
(굳이 다룰수 있는 악기가없다는것을 밝히고, 앞으로도 그럴꺼라는것을 써야했을까? 그보다는 의도를 밝히고, 나의 한계를 제시한후 극복하는 과정을 쓰는것이 낫지않을까?)
저는 학교에서 드럼을 처음 쳤습니다. 수많은 악기들 중에 굳이 드럼을 선택한 이유는 평소 락음악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드럼을 치면서 제가 박자감각이 부족한 박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꾸중을 자주 듣고, 같은 밴드 친구들에게도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하지만 드럼 교유의 비트와 소리는 여태까지 제가 들은 소리들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였고, 이를 포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습이었습니다. 기존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점심시간,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틈틈이 연습했고, 치기 어려운 박자가 있으면 경쟁밴드 친구에게 부탁하여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손에 물집이 많이 터 스틱을 잡기 힘들 정도로 끊임없이 연습한 결과 실력이 빠르게 늘기 시작했고 점차 박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 저의 치열함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정규 연습시간은 물론 틈나는 대로 펜으로 연습했고, 손에 물집이 잡혀 스틱을 잡기 힘들 때는 붕대를 감고 드럼을 두들겼습니다. 노력은 정직했습니다. 실력이 급상승해 졸업 때까지 남아공월드컵 공연을 포함해 수많은 공연에 당당히 드러머로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6줄을 3줄로 바꿔줬다. 과정이 너무 길었기 때문.. 이러면 읽는사람만 피곤하다.. +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수도있다)
이러한 노력이 빛을 발하여 2010년 남아공월드컵 때 첫 공연을 시작으로 졸업하기 전까지 많은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드럼은 제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힘들어할 때면 저를 위로해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그 기쁨을 함께 나눈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삶의 축복인 드럼과의 인연을 영원히 이어가고자 합니다.
▶ 무능력이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뜻은 상대방이 무능력자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지 무능력자 본인이 본인에게 주는 면죄부가 돼서는 안됩니다. 저는 밴드부를 통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저의 취미생활을 가지게 됐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680자)
(ㄷ)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삶에는 행복한 인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 아픈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렸을 때 저는 오랫동안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할머니에게는 치매 증상이 나타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증상은 악화되었습니다. 결국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가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습니다. 당시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 찾아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슬픔도, 할머니도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학교 앞에 있는 인덕원이라는 노인요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슬픔이 새로운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할머니의 아픔인 동시에 저의 아픔이었습니다.
( 이런 경험적인것도 좋다. 하지만 요즘 이슈가 되고있는 '무상급식'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볼까한다. 물론 이건 도박이다. 누가 보냐에따라. 정치 성향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수있기 때문.. 그래서 직접적으로 찬성한다. 반대한다가 아닌. 의견없다고 바꾸었다.)
▶ 저는 아직 무상급식에 대해서 확실한 의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찬반 양쪽 모두 경청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까지의 제 입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무상급식 찬성 쪽의 논리는 크게 동의합니다. 적어도 기본적인 의식주 분야에서 만큼은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양원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고, 휠체어를 끌며 산책을 하고, 속옷을 입혀주면서 저는 그분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희 할머니가 요양원에서 느끼셨을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할머니께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던 제 모습이 너무 후회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공연봉사를 한 것처럼,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제가 손자만이 드릴 수 있는 기쁨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처럼 양로원에 계시는 노인분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인연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고 뒤늦게 인연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쓸대없는 말들을 많이 썻다.. 그래서 지우고 조금 고쳤다.)
개인적인 이유로 길게 할 수는 없었지만, 요양원에서의 체험은 노인복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식들이 경제력이 없어서 오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자식들이 모시고 싶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각 가정에서 부모님들을 모시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 역시 자식들에게 자신이 짐만 된다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게중에는 자식들마저 없는 분들도 계셔 마지막 남은 인생을 쓸쓸하게 보내셔야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서 아이의 생활이 결정되는 것은 분명 불합리합니다. 그렇다면 자식들의 경제력에 따라서 부모님의 노후가 결정돼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성장해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노인들은 육체적으로도 무력하기 때문에 자식 이외의 도움이 보다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노인 봉양은 자식만의 몫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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